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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학당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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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학당논란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한국전쟁 제1호 피난민

이승만 학당에서 뭘 배울까?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이 화제다. 이승만 학당 60년대나 있을법한 이승만 학당이 2019년 현재 논란이 되고 있다.

 


이승만 학당의 교장이 바로 이영훈교수라고 한다. 

이승만 학당

24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이승만 학당의 존재가 드러났다. 위안부 역사를 편파적으로 알리는 유튜버들의 바탕에 이승만 학당이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이승만 학당을 알게된 누리꾼의 반응이 뜨겁다.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TV)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승만 학당은 '대한민국 건국정신의 배움터'를 뜻하며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공부하고 자유의 소중함을 배우는 곳'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승만 학당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정치경제사상, 독립운동과 건국의 업적을 연구, 교육, 홍보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


최근 논란이 된 반일 종족주의 집필 학자들이 이승만 학당에 대거 소속돼있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이우연 낙성대 경제연구소 소장,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주익종 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학예실장 등이 이승만 학당 학자들로 밝혀졌다.

 


최근 조국 후보는 반일 종족주의는 구역질나는 책이라고 비난하며 이영훈 교수와 논란이 일기도 했었다.

이승만 학당


 <이승만>

이승만(李承晩, 1875326일생)은 조선과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의 개화파, 언론인,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지냈다. 

이승만 학당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대통령직선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 등 민주적 절차를 흠결한 두 차례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에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에 의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미국 하와이를 요양차 방문한 후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


한국전쟁 제1호 피난민 이승만, 국민버린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낚시를 좋아했다. 1950625일 오전 630, 이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이른 아침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서울 창덕궁의 비원 반도지에서였다. 그때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이 들어와 전쟁 발발 소식을 보고한다. 평화로운 낚시와 전쟁 보고의 결합은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


오후 2, 이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가 열렸다. 1시간 30분간 이어진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하지만 회의 직후 이 대통령은 대통령령 제377호로 <비상사태하의 법령공포식의 특례에 관한 건>을 공포했다.

 


이를 통해 이 대통령은 긴급명령 제1호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했다.

9, 이 대통령은 무초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나 '내가 공산군 손에 들어가면 나라가 곤란하게 되니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다'라는 뜻을 전했다. 무초는 '잡히는 것은 안될 일이지만 잡히기 전까지는 서울에 머물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국가 원수이자 전시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의 당연한 책무였다.

 

이승만 학당


이 대통령은 즉시 피난 갈 것을 거듭 고집했다. 결국 626일 오후 3시에 피난을 공식 결정했다. 그 시각 국회에서는 서울 사수와 철수 문제를 놓고 밤샘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찬반투표로 서울 사수가 결정되었다. 그 결과를 알리기 위해 국회 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없었다. 한국전쟁기 대한민국의 제1호 피난민이 대통령임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 대통령은 서울역을 새벽 4시에 출발해 낮 1230분에 대구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조언 때문에 열차를 되돌려 대전으로 갔다. 오후 430분이었다.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


대전으로 내려간 이 대통령은 국민들의 피난을 가로막는 거짓 연설을 방송했다.

며칠 뒤에는 대전보다 남쪽인 부산으로 피난했다. 서울 영등포 전선이 굳건히 지켜지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이승만 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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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

이승만 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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