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소 아버지 단성사
이미소 아버지는 단성사 아들인가?
김부선과 공지영의 논쟁으로 또 다시 이미소 친부(아버지)에 대한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김보선은 미혼모로 딸 이미소를 낳아 홀로 키워왔다.
배우 김부선이 딸 이미소의 친부가 재벌가 유부남이었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김부선은 지난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누구나 로망은 있다`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올리고 굴곡진 인생사를 털어놨다.
그는 "끼 많은 20대의 나는 외로웠고, 지독히 고독했다"면서 "재벌가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고 잔인하게 버림받았다"고 적었다.
이어 해당 남성이 유부남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졸지에 미혼모가 됐고, 주연배우에서 단역배우로 순식간에 전락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딸의 친부는 가정이 있다는 이유로 아이를 책임지지 않겠다고 했고, 임신 2개월 만에 자신을 떠났다고. 김부선은 "그가 내게 말했던 달콤한 속삭임들과 내게 했던 말들, 그 추억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섬처녀 신인 배우를 꼬셔내기 위한 거짓이었다"고 돌아봤다.
김부선은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딸을 낳았지만 친부가 1년 만에 나타나 아이를 빼앗아 갔다고도 주장했다. 이어 그는 눈앞에서 딸을 빼앗긴 뒤 15개월간 성북동과 아이아빠 집을 오가며 울부짖은 끝에 일체의 위자료와 양육비를 받지 않는다는 조건에 서명하고 아이를 되찾아왔다고 썼다.
김부선은 "그 후 아이 아빠는 미국으로 부부 여행을 떠났고 거기서 또 다시 낯선 여인과 눈이 맞아 부인과 이혼하고 재혼했고 딸을 또 낳았다"며 "충격의 연속"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미소를 대학까지 보낸 후 내 삶은 책임과 긴장에서 조금 풀렸다. 그러다 집회 현장에서 2007년 12월 중순 발칙한 촌놈 이재명을 만난 것"이라고 설명한 뒤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미혼모였던 김부선 그녀에 얽힌 과거가 새롭게 주목을 받으면서 이미소 아버지에 대한 누리꾼의 관심이 커저 가는 가운데 이미소 아버지 이정길이란 검색어까지 등장했지만, 배우 이정길과 이미소, 김부선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한다.
과거 김부선과 같이 활동을 했던 한 영화감독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이미소의 아버지는 단성사 창업주의 아들이라고 한다.
한 영화감독은 “김부선이 낳은 딸의 아빠가 서울에 있던 단성사 극장 창업주의 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고 이는 단성사 극장과 김부선의 함수관계에 대해서 그 당시 활동한 연예부 기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고 한다.
연예계에서 불운의 배우로 인식되고 있는 영화배우 김부선의 본명은 김근희로 1961년 7월 10일 제주특별자치도 남제주에 출생한 미모의 영화배우다. 김부선은 대정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죠다쉬, 프로스펙스 등의 모델로 활동하다가 83년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로 영화에 데뷔하여 1985년 ‘애마부인3’로 인기배우 반열에 올랐다. 연기자 생활을 할 때는 '염해리'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소의 아버지가 단성사 창업주의 아들이라는 것 역시 김부선의 입을 통하여 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단성사 극장과 김부선의 관계에 대한 연예부 기자들의 설일뿐 아직 이미소 아버지에 대한 진실은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 후, 김부선은 2014년 영화 ‘모던 파머 (2014)’ ,‘몬스터 (2014) , 네 이웃의 아내 (2013)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미모의 여성으로 한참 인기를 얻을 무렵에 간통 사건으로 구속이되면서 당시 연예계를 충격을 주었던 김부선은 그 이후 연예계를 한동안 떠나 연예기자들 사이에는 김부선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하는 영화 감독들이 많았다.
한편 김부선은 서울 하남동 옥수동 유엔빌리지 근처 흐름한 아파트에서 당시 어린 딸 이미소를 데리고 살아온 삶은 산전수전을 떠나 그녀를 무참하게 만든 한 남성의 피해자로 한국 연예계에 새로운 조명을 받을만한 영화배우다.
1990년대 서울 한남동 옥수동 올라가는 모퉁이에 단란주점을 운영하기도 한 김부선은 자신도 어려웠지만 불우한 연예인 특히 생활이 어려운 원로들에게는 자신의 힘이 부칠정도로 성심성의 어려움점을 도운 미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운은 그녀에게 또 다가와서 여러 가지의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당시 구속영장의 내용에 따르면 김부선은 함께 구속된 단성사 부사장과 내연의 관계로 상습적으로 대마초를 피우 혐의로 되어 있다. 끝까지 생의 한귀퉁이에서 그녀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한 남성의 악순환의 고리는 끝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그후 김부선은 “대마초는 마약이 아니다”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이후 이에 대한 홍보를 적극적으로 한 여자 연기자이다.
한편 김부선과 악연이 된 서울 단성사 극장은 2001년 9월 단성사 건물이 철거되고 신축공사로 착공되어 2005년 2월 7개관을 갖춘 규모의 멀티플랙스(Multiplex) 영화관으로 개장되었다가 2006년 3개관을 추가하였다.
그러나 2008년 4월에는 씨너스 단성사가 되었으나 경영난으로 부도처리되어 같은 해 11월 아산엠그룹이 인수하여 아산엠 단성사로 출범한 역사의 극장이다.
[단성사의 역사]
단성사(團成社)는 1907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에 세워진 대한민국 최초의 본격적인 상설 영화관이다. 현재, 단성사는 종로3가역 3호선 출구와 가깝고 CGV 피카디리 1958점과 마주보고 있다.
1907년 서울 종로3가에 단성사가 설립되었고 1915년 2월 화재로 극장 소실되었지만 그 해 5월에 다시 개장하였다.
1917년 다무라 요시지로(田村義次郞)에 매각되면서 경성 내 조선인이 소유한 극장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었다. 이후, 1918년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이 인수하여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했고 1919년 10월 27일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로 알려진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단성사에서 최초로 개봉된 의리적 구토로 인해 이날이 우리나라 영화의 날로 제정되기도 했었다. 1924년 단성사 촬영부는 7권짜리 극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 상영함으로써 최초로 한국인에 의한 극영화의 촬영·현상·편집에 성공하게 되었고 1926년에는 《나운규》의 민족 영화 아리랑을 개봉하기에 이른다.
1926년 이후 단성사는 조선극장, 우미관과 더불어 북촌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일인 영화관인 황금좌, 희락관, 대정관등과 맞서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음악·무용 발표회 등에도 무대를 제공하여 새로운 문화의 매체로 큰 몫을 수행했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대륙극장으로 개칭하였다가 1945년 광복 후 다시 단성사로 복귀하여 악극(樂劇)을 공연하게 되었다. 이후 2001년 9월 구 건물이 철거되었고, 2005년 2월 지하 4층, 지상 9층에 7개 관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했다.
2006년 9월에는 3개 관을 추가하여 총 10관에 1,806석 규모의 극장이 되었다. 2008년 4월에는 멀티플렉스 체인인 씨너스 단성사가 되었으나 같은 해 9월 23일 경영 악화로 부도 처리된 뒤, 11월 아산엠그룹이 인수하여 아산엠단성사로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다. 하지만, 2012년 8월 법원, 경매 개시 결정이 났고 2015년 3월 12일 법원 경매에서 575억원에 영안모자 계열법인인 자일개발(주)로 낙찰되었다.
단성사는 2016년 9월 1일 단성골드빌딩으로 이름을 바꾸고, 1층에 백화점형 주얼리도소매센터 오픈을 시작으로 2017년까지 보석 역사관 오픈, 단성사 영화관 복원, 한국영화100년 역사관 개관 등이 차례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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